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 이슈에서 한국 언론 편향적인 보도의 한계를 느끼며, 이번 글에서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침공한 배경을 이해하고자 하마스 뜻, 정체, 성장 배경 등 역사적 사실을 기본으로 이슬람 무장 단체로 보도되고 있는 하마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언론의 하마스 관련 보도: 한계와 문제점
2023년 10월 7일부터 시작된 가자지구와 이스라엘 간의 대규모 무력 충돌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사태에 대한 주류 언론의 보도에서 가장 주목받는 키워드는 ‘하마스’ 이지만, 이 보도들의 대부분은 하마스의 실체, 그들의 배경과 기원,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전략에 대한 깊은 분석이 부족한 상태로 그저 무장 테러 단체 정도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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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서는 심층적인 분석을 담은 기사나 보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한국의 주류 언론이 서방 외신의 파편적인 정보만을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사실입니다. 과연 하마스는 어떤 단체일까요?
하마스 명칭의 뜻, 시사점
하마스(Ḥarakah al-Muqāwamah al-ʾIslāmiyyah) : 이슬람 저항운동
‘하마스’는 아랍어에서 ‘이슬람 저항운동’을 의미하지만, 이 단어는 아랍어에서 ‘힘’, ‘열의’, ‘용기’와 같은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히브리어에서 ‘하마스’는 ‘폭력’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는 ‘힘’이라는 개념이 어떤 상황에서는 긍정적인 ‘용기’로, 다른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마스의 기원과 무슬림 형제단
하마스의 뿌리는 20세기 초 이집트에서 탄생한 ‘무슬림 형제단’에 연결됩니다. 이 무슬림 형제단은 현재 아랍-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이슬람주의 우익 정치 세력 중 하나로, 한때 이집트의 주요 정당으로 집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조직이 처음 팔레스타인에 진출했을 때, 그들은 정치적 투쟁보다는 이슬람의 보수적 가치와 교리 교육, 그리고 사회 봉사와 자선 활동에 중점을 둔 집단이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 점령, 그로 인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난민화로 인해, 무슬림 형제단은 이들에게 다양한 사회 봉사, 복지, 교육, 그리고 자선 활동을 제공하며 사람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어갔지요. 즉, 하마스는 지금의 무장 단체가 아닌 공익을 목적으로 한 사회 단체로 시작한 것입니다.
하마스의 성장과 그들의 비전
단체나 조직이 성장하면 그에 따라 그들의 영향력도 점점 확대됩니다. 특히, 사람들의 지지와 돈의 힘이 모일 때, 그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는데,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이런 변화의 중심에 있던 단체가 바로 ‘하마스’였습니다. 이들의 사회정치적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의 1차 ‘인티파다’라는 대규모 저항 운동 때였습니다. 바로 이 시점부터 하마스는 무슬림 형제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대 이스라엘 무장 저항 단체로서 독립적인 위치를 확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 기술된 이상적인 종교 공동체 ‘움마’를 기반으로, 이스라엘의 압박에서 벗어나 독립된 팔레스타인 국가를 창립하는 것이었죠.
하마스의 활동 변화와 그 배경
1차 인티파다에서 하마스는 대체로 비폭력적인 저항이 주를 이뤘지만, 2차 인티파다에 이르러서는 폭력적 저항과 인명 손실이 빈번히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2006년 1월 총선에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주요 정당인 알 파타 당을 누르고 가자지구의 주요 정당으로까지 부상하게 됩니다. 원래 종교와 사회 복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하마스가 어떻게 팔레스타인의 주요 무장 조직 및 정당으로 성장하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의 현대 역사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현대사와 하마스의 역할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의 ‘재앙’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서구 시온주의자(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건국 해야 한다는 이념)들의 이념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가 건국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건국은 유대인들에게는 ‘독립’이었지만 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재앙(아랍어로는 ‘나크바’)’이었죠. 이스라엘 무장 집단들은 ‘독립’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 청소 및 학살을 자행했으며, 그들이 살던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폐허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팔레스타인인 여성들에 대한 전시 성폭력도 수반되었는데, 이 시기 대략 70만 명으로 추산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이 발생됩니다.
6일 전쟁과 팔레스타인의 ‘후퇴’
그리고 1967년, 이스라엘에서는 ‘6일 전쟁’으로도 불리는 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이 다수 살고 있던 서안 지구와 본래 시리아 영토인 골란 고원 상당 부분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때도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어야 했는데, 그 수가 대략 40여만명에 달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아랍 세계와의 전쟁에서 6일 만에 승리했다는 의미의 ‘6일 전쟁’으로 일컬어지나,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나크사(후퇴 혹은 퇴보라는 뜻의 아랍어)로 불립니다. 이후 다른 아랍국의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연대와 해방을 이야기했으나 결국 팔레스타인을 외면했고 자국에 망명 중인 팔레스타인 운동가들까지 탄압했습니다.
가자지구의 현실
결국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은 여기저기로 내몰리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이집트와의 국경에 근접한 가자 시와 칸 유니스로 군집하였습니다. 오늘날 미디어에서 지칭되는 ‘가자지구(Gaza Strip)’가 바로 1948년과 1967년을 전후하여 두 차례 대규모로 발생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몰린 가자 시와 칸 유니스 지역을 뭉뚱그려 지칭하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지칭되는 ‘팔레스타인 영토(Palestinian territories)’는 대체로 이 가자지구와 요르단 국경 및 사해를 동쪽으로 하여 접해 있는 서안 지구(웨스트 뱅크) 및 동예루살렘을 가리키는데, 현재까지 가자자구 총 인구의 대략 70퍼센트 가량이 가자 시 및 칸 유니스와 연고가 없는 팔레스타인 난민들 혹은 그 자손들입니다.
2022년 추산으로 가자지구의 총 인구는 237만여명으로까지 증가했고, 전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높은 인구 밀도와 더불어 현재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정부와 군의 오랜 점령 및 침탈, 뒤이은 통제와 봉쇄 정책, 여러 차례의 폭격으로 인해 삶의 질이 낙후되어 있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 혹은 ‘야외 감옥’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마스의 부상
하마스는 앞서 말했든 원래는 종교와 사회 복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단체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가자지구의 주요 무장 조직 및 정당으로 성장하게된 것이죠.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의 현대사를 깊게 파악해야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마스의 성장 배경
팔레스타인인들의 종교 의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은 절망적이고 무력한 상황에 내몰렸을 때, 혹은 삶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종교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정부의 오랜 점령 정책 및 차별 대우, 열악하고 빈곤한 난민 생활로 인해 사회심리적으로 취약해져 있었고, 자연히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조상들로부터 이어져온 신앙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팔레스타인의 종교 변화
오랜 기간 동안 같은 민족 정체성을 공유하며 이웃으로 지내왔던 그리스도교계 팔레스타인인들이 무슬림들에 비해 출산율이 정체 되고 이민을 떠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본래 다수를 차지해왔던 무슬림 인구의 비율이 과거보다 더 높아졌습니다. 그렇다보니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에게 이슬람 신앙은 자연히 팔레스타인의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건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하마스의 전략과 성장
하마스는 이처럼 팔레스타인의 사회심리적 조건을 파고들어 종교적 메시지에 호소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종교 보수주의를 대 이스라엘 무장 투쟁 노선 및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담론과 교묘히 조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게다가 하마스 이전까지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을 이끌어왔던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끊임없는 내부 노선 투쟁으로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고, PLO의 최대 정파인 알 파타 당은 지도부의 부패와 무능, 반대파 탄압, 이스라엘과의 타협으로 인해 민심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하마스는 상당히 탄탄하고 안정적으로 조직이 운영되었고,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다른 그 어느 정파보다도 과격하고 폭력적인 투쟁 노선을 지향했지만, 팔레스타인 내에서 소수자에 속하는 그리스도교 성당을 찾아가 위무하는 등 팔레스타인 내부의 다양한 민심에 대해 자주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인 것이죠. 이런 신뢰와 신앙심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인들, 그 중에서도 가자지구 주민들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없이 하마스를 지지하게 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이념 변화
결국 자연히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민심을 잃은 PLO에서 하마스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의 이념적 토대도 PLO가 표방하던 정교 분리 원칙을 지향하는 세속주의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포함하는) 이슬람 보수주의로 그 무게 추가 좀 더 기울어지게 됩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미국의 관계
하마스의 창립 과정 속 이스라엘의 역할
하마스의 초기 발전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 및 정보부가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내던 초기 하마스를 묵인 및 방조하는 것을 넘어 은연중에 후원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후원에는 이스라엘의 최대 후견국인 미국도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는데, 수십년간 서로 살벌하게 적대해온 두 집단이 초기에는 서로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지원한 이유
당시 PLO는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위기감을 느끼고 PLO를 약화시키기 위한 대안으로 하마스와 같은 이슬람주의 집단을 지원했던 것이죠. 하마스의 초기 성장은 전부 이스라엘의 지원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였습니다.
하마스의 지도자와 이스라엘의 후원
하마스가 종교적 사회 단체를 넘어 커다란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거대 정파이자 무장 집단으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이라는 지도자의 공이 컸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스라엘 정보부의 기습적인 암살(사실상 테러)을 당하게 되지만, 본래 초기에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슬람 교육 기관, 단체, 모스크 등을 세우며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로부터 금전적인 후원을 받았는데, 결국 하마스의 극초기 성장은 이스라엘의 식민 침탈 및 점령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마스가 현재 PLO에 버금가는, 팔레스타인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을 보면 상당 부분 이스라엘과 그 후견인인 미국 행정부에게 빚을 졌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 이러한 이유입니다.
현재의 관계와 논평
현재 이스라엘과 미국은 하마스를 비난하며 그들의 과격한 무장 활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들의 초창기 하마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마스 역시 이스라엘과 서방에 대한 비판적인 언사를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초기 이스라엘 지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재밌는 현상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하마스의 복잡한 역사와 이들의 국제적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깊은 연구와 분석이 필요합니다.
특히, 하마스의 초기 성장에 이스라엘과 미국의 역할을 고려할 때, 현재의 국제 정치적 논평은 더욱 신중해져야만 우리는 더욱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중동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