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원주민 중 하나인 아이누족 아시나요? 이 글은 아이누족의 전통과 신앙 및 문화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일본 내에서도 아이누족 차별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데 재미있게도 아이누족과 일제강점기 조선인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아이누족 누구인가?
7년 전 일이다. 필자는 한 시민단체의 주관으로 홋카이도를 일주일간 견학한 일이 있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아이누족 마을을 방문했다. 필자와 일행이 방문한 아이누족 마을은 홋카이도 최대 도시인 삿포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히다카 지청에 소재한 비라토리 쵸에 있었다.
일본의 아이누족(Ainu)은 홋카이도, 사할린섬, 쿠릴 열도에서 살았던 일본의 토착 원주민이다. 일본 본토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언어와 문화,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으나 일본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아이누족의 문화와 전통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1899년 ‘홋카이도 구 원주민 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아이누족 언어 사용과 전통적인 생활 방식은 금지되었다. 그렇게 일본 사회에 통합된 아이누족은 현재까지도 동화 정책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일본인처럼 살도록 강요받고 있다.
아이누족 전통 가옥과 아이누족 마을 풍경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하면서도 도회적인 디자인이 반영된 주택들이 늘어선 지구를 가로질러 우리는 아이누족 마을에 도착했다.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누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산간 지역 한복판에 지어진 그 건물은 갈대로 덮여 있었고 한가운데에 창문이 나 있었다. 갈대로 지붕을 덮은 모양새는 흡사 우리나라의 과거 초가집을 연상시켰다. 그런 건물이 두어 개 정도 더 보였다. 확실히 필자에게 익숙한 일본 도시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어딘가 또 다른 외국에 와 있는 듯하면서도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도 더 토착적이라는 느낌.
아이누족 마을의 모습은 어딘가 투박해 보이면서도 산과 나무 풀과 바람이 어우러지는 자연의 경관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듯했다. 게다가 날도 저물어 해질녘 무렵이었다. 선선한 공기 중에서 가을 하늘의 노을이 산 아래로 스며들어 마을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다소 빡빡한 일정으로 지쳐 있었던 필자는 다시 생기가 돌았고 호기심을 느꼈다.
아이누족의 전통 신앙 : 자연과 정령숭배 사상
아이누족의 신화와 종교는 자연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비록 제도화된 형태는 아니지만, 아이누족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시대부터 특유의 자연 친화적인 정령숭배 신앙을 유지해왔다. 그들은 동식물뿐 아니라 불, 바람, 물과 같은 자연 무생물에도 혼이 깃들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식량을 위해 동물을 잡을 때도, 오랫동안 쓰던 물품을 처분할 때도 이 정령숭배 사상에 근거해서 의식을 치르듯이 한다. 집 안에 아궁이를 파고 불을 피우는 것도 그러한 의식의 일환이다. 불을 지피고 지켜보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성을 되새긴다.
가이드를 해주시던 아이누족 할머니는 방문객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근방의 산속에서 죽은 인간들의 원혼들이 떠돌곤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옛적에 본토인(즉 일본인)들이 이 땅을 개척하고 차지하면서 섬의 원주민인 아이누인들과 충돌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는데 그때 죽은 이들의 원혼들이 산 주변을 배회하더란 이야기였다.
아이누족과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연대
그러던 중 할머니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사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홋카이도에 있는 탄광으로 강제 징용되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갖은 착취를 당했고 결국 그중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최대한 절제된 어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했다.
할머니의 남편분은 강제 징용되어 끌려가던 와중에 탈출한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탈출 와중에 우연히 그는 아이누족 마을에 이르렀고, 주변의 아이누인들은 그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일본인 경찰이 순시할 때마다 그를 숨겨주거나 아이누인으로 위장시켰다고 한다. 할머니와는 그때부터 안면이 트게 되었고 곧 마음이 맞아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평생 해로하면서 아이누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는 영면할 즈음에는 끊임없이 고향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말을 하곤 했다.
기억해야 할 아이누족과 조선인의 역사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주변에 할머니 부부와 같은 사례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강제징용에서 탈출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아이누인들이 숨겨주곤 했고, 그 과정에서 할머니의 남편분처럼 아예 아이누족 마을에 정착하여 결혼하고 가족을 꾸려나간 이들이 있었다. 실제로 많은 문헌이 일제 시대 아이누인들과 조선인들이 약소민족이자 소수자로서의 동병상련에서 비롯된 연대와 상부상조의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이누인과 조선인 사이의 통혼은 꼭 빠지지 않았다.
최근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인 신일철주기업에 청구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유효하다는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 뉴스를 보게 되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홋카이도 탄광 및 개척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은 15만 명 이상이었다. 그중 2천 명이 넘는 이들이 살아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탈출에 성공한 조선인들을 보듬어준 아이누족과 매일같이 매질과 비명 속에 쓰러져간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남겨진 우리의 의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