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골령골에 은폐된 제주 4.3 사건 요약과 보도연맹 학살 바로 알기

이 글은 산내골령골에 은폐된 제주 4.3 사건 요약과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요약 글 입니다. 산내골령골 유해 발굴을 시작으로 모습을 드러낸 한국 근현대 역사의 아픔을 통해 제주 4.3사건 보상 문제와 국민보도연맹 학살 보상 문제에 관심 갖고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아셨으면 합니다.

산내골령골의 역사적 배경

대전시 동남부에는 대전시에서 가장 높은 식장산(598m)이 있다. 이 식장산을 경계로 대전시와 옥천군이 마주하고 있는데, 정상에서 바라본 야경과 도시 전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대전시와 옥천군 주민들 사이에서 등산로나 대전 데이트코스로 인기가 있다.

대전 식장산 야경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식장산의 남쪽 산자락 끝에는 수십 년간 은폐되어온 국가폭력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불리는 산내골령골이다. 산내골령골은 한국전쟁 개전 당시 국군이 후퇴하기 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의 지시로 군, 경에 의해 수천 명의 국민보도연맹원, 대전형무소 재소자가 학살당한 후 암매장된 곳이다. 당시 미 제25단 CIC 파견대의 전투보고서에 이 학살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으며,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 에드워드 중령이 미 육군 정보부로 보낸 보고문에서도 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군도 상당 부분 개입하여 미국 정부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 4.3 사건 요약

1. 제주 4.3 사건 원인과 전개 과정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제주도에서의 민중 봉기와 그에 대한 정부의 강경 진압을 사건을 말한다. 근본적인 제주 4.3 사건 원인은 해방 후 혼란스러웠던 정세 속에서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 간의 갈등, 그리고 미 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의 갈등과 억압에서 비롯되었는데 특히, 1947년 3월 제주도에서 발생한 경찰 발포 사건이 4.3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주 4.3 사건 원인
제주 4.3 사건 원인이 된 1947년 3월 제주도에서 발생한 경찰 발포 사건

당시 제주도민들은 고율의 세금과 미 군정의 폭압적인 통치, 그리고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해 많은 희생자를 내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좌익 계열의 남로당 제주도당은 봉기를 조직했고,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군과 경찰을 동원해 ‘초토화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제주도 전체를 철저히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대거 희생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무장봉기 세력뿐만 아니라 가족과 주민들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학살로 이어졌다. 이것이 제주 4.3사건이다.

2. 산내골령골과 제주 4.3 사건의 연관성

제주 4.3 사건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외에도 체포된 수많은 제주도민들은 재판을 통해 형을 선고받은 뒤 육지의 여러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주로 대전형무소를 비롯한 여러 교도소에 갇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은 그냥 빨갱이로 취급되었으며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정부의 즉결 처형을 명령했다. 이때 처형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산내골령골이다. 이때 수감자들은 대전형무소에서 산내골령골로 끌려와 구덩이 앞에 엎드린 채 총살을 당했고, 시신은 구덩이에 무더기로 매장되었다. 희생자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학계는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요약

1. 국민보도연맹이란?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좌익 사상을 버리고 전향한 사람들을 재교육하고 관리하기 위해 설립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보도연맹의 설립 목적과 달리, 이는 사실상 정부에서 잠재적 좌익 세력을 일괄적으로 등록하게 하고 등록된 사람들을 쉽게 감시하기 위한 명단에 가까웠다.

2. 학살의 원인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보도 연맹원들은 자연스럽게 ‘빨갱이’ ‘적의 협력자’로 불리며 한국 정부의 주요 타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후 현재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는데 정부가 ‘적의 협력 가능성’이라는 명목 아래 공권력을 이용해 민간인을 제거하는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한 대표적 사례로 아직까지 기록되고 있다.

3. 산내골령골과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연관성

국민보도연맹 학살 현장

제주 4.3사건 수감자들의 형이 집행된 산내골령골에서 똑같이 국민보도연맹 학살이 자행되었다. 대전 지역에서 보도연맹원으로 분류된 이들은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산내골령골로 끌려가 처형되었는데 이들의 학살의 방식은 조직적이고 매우 잔혹하기로 유명하다.

  • 처형 방식 : 길게 판 구덩이 앞에 희생자들을 엎드리게 한 뒤 총살하고 총살 후에도 구덩이에 다리가 삐져나오거나 신체 일부가 보일 경우 바윗덩어리로 내리쳐 매장.
  • 매장 방식 : 시신은 흙으로 덮은 뒤 구덩이 위에 다시 흙을 쌓아 사건 은폐, 학살은 매일 반복되었고, 수천 명의 희생자 발생

문제는 이러한 학살이 산내골령골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있는데 학계는 전국적으로 벌어진 국민보도연맹 학살로 희생된 민간인의 수를 최소 2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내골령골 발굴 작업에서 발견된 유골들은 그 비극을 여실히 드러내는데, 여러 명의 시신이 뒤엉켜 묻혀 있었으며,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내골령골 유해 발굴 작업

산내골령골의 유해 발굴 작업은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주도로 시작되었으며, 2020년 대전 동구청과 시민 사회가 추가로 발굴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산내골령골 유해 발굴은 이미 2000년대 이래로 몇 차례 발굴 작업 및 탐사, 유해감식을 거쳤음에도 땅을 깊이 팔수록 유해가 계속 나오고 있다.

산내골령골 유해 발굴 현장

대략 수 미터가량의 깊이에서부터 각 부위의 뼈들이 부러지거나 뒤엉킨 채로 그 모습을 드러나는데, 흙과 자갈, 모난 돌덩이들에 뒤섞여 나오는 유골들을 둘러싸고 발굴팀 모두가 숙연해지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이처럼 한국 역사의 아픔과 함께 산내골령골에 매장된 이들은 그 죽음의 기억마저 은폐 당했다. 그리고 그 은폐된 죽음의 무게는 수십 년 동안 유가족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다.

산내골령골이 남긴 역사적 의미

1. 민간인 학살의 증거 현장

산내골령골 위령탑

한국전쟁은 비무장 민간인 사상자의 비율이 유독 높았다. 그 원인은 물론 살상 무기가 고도로 발달한 것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남북 양국에서 무수한 민간인들과 정치범 및 그 가족들을 ‘부역자’ 내지 ‘적’으로 몰아 살상했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자면 이 일련의 학살들은 전시 행동에 대한 법적 체계와 인권 개념이 부재했던 전근대에 벌어진 학살이 아니다. 국제법의 기초가 다져진 지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며, 제4차 제네바 협약을 통해 민간인들과 전쟁 포로들에 대한 안전장치가 국제법적으로 마련된 이후에 자행된 학살들이다. 그것도 제각기 다른 근대적 이데올로기(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내세워 근대적 문명국가를 자처했던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의해서 말이다. 산내골령골에서 자행된 학살은 명백히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증거가 되고 있다.

2. 남겨진 유족 보상 문제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보도연맹사건 및 제주 4.3사건 유가족들에게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국가 공안 기관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63년 박정희 당시 대선후보는 ‘4·19 혁명 계승’, ‘한국적 매카시즘 청산’을 공언하며 당당하게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당선 이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족회가 결성되어 진상 규명을 요구하다 되려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은 유족도 있었다. 이처럼 제주 4.3사건 보상 및 보도연맹 보상은커녕 유족들은 간첩의 누명 속에서 살아갔다. 이런 비극을 두고 한 역사학자는’ 죽음마저 죽여버린 사회’라고 표현했다. 아픈 역사는 뒤로하더라도 남겨진 이들에게 제대로 된 정부의 보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산내골령골의 교훈과 남겨진 과제

한국전쟁 중 남한 내에서 국가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의 수를 유족회 측에서는 100만 명, 학계에서는 30-4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그중 한국전쟁 개전기에 벌어진 보도연맹원 및 형무소 재소자 학살만 해도 이미 수십만으로 추정된다. 다른 지역의 국가폭력 사건과 비교해 본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중국에서 자행한 난징 대학살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빗대어 ‘아시안 홀로코스트’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한반도 땅에서 불과 몇 달 동안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 수와 맞먹는, 아니 어쩌면 이를 훨씬 상회하는 수의 비무장한 민간인들을 국가 공권력이 살상한 것이다. 그것도 같은 동포요, 국가가 전시에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자국민들을!

산내골령골 위령식
산내골령골 제주 4.3 사건, 국민보도연맹 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위령식 모습

우리는 근대를 거치며 무수한 곡절 끝에 엄청난 발전과 향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도 산내골령골에 연고자 없이 묻혀 있을 원혼들을 떠올리며 자문해 본다. 너무 앞만 보며 달려온 것은 아닌가? 근대 국가의 신화에 가려진 은폐된 역사를 너무 방치해왔던 것은 아닐까? 나는 유럽 청교도들이 문화적, 인종적 타자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배제하면서 근대 국가를 형성시켰던 역사를 추적하면서 우리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너무도 많은 이들이 배제되고 그 존재마저 부정당해야 했다. 근대 이래로 우리가 미국과 일본을 쫓아가면서 그 어두운 단면마저 답습해버린 까닭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근대 국가의 신화를 넘어설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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