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립운동사는 그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여러 영웅들의 투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홍범도 장군은 빛나는 영웅으로서 독립의 꿈을 향해 힘들게 싸운 투사로 기억되고 있지만 최근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여러 논란이 함께하면서 국방부의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흉상을 철거하기로 한 사건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과연 홍범도 장군은 어떤 분이고 어떤 논란 때문에 돌아가신지 무려 80년이 지난 지금,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일까요?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업적
출생과 무장 투쟁의 시작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안북도 자성(현재의 평)에서 가난한 집안의 한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는 혼돈의 한국 근현대사가 시작하는 시발점과 맞닿아 있던 시기입니다. 여러 열강들의 조선 침탈의 야욕 속에서도 홍범도 장군은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조선의 자주를 위한 투쟁을 주장하였고 1907년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정미 조약을 통해 일본이 차관 정치의 일환으로 조선 내 모든 총기와 화포를 수거하기로 선포하자 산포대(山砲隊)라는 조직을 창설하여 일본군의 무력 항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으로 활약
1910년 한국이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되면서, 모든 자주권을 잃게 되자 홍범도 장군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전력을 쏟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19년 3.1 운동 당시 대한 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국내에 잠입해 갑산, 혜산, 자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며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만포진 전투에서는 일본군 7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주역
청산리 전투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은 교과서에 등재되는 등 많은 이들에게 가장 대표적인 독립군 대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 역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빠질 수 없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홍범도 장군은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습니다. 이 봉오동 전투는 이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논란
자유시 참변이란?
자유시 참변은 아직까지도 학자들이 연구 중인 사건으로써 대단히 복잡하지만 아주 쉽고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당시 독립군의 상황 : 먼저, 1920년대 초 일본은 대대적인 독립군에 대한 공격을 강행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독립군은 간도(현재 중국의 연변 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근거지를 근처의 러시아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주목하셔야 하는 점은 당시 활동하는 대한민국의 독립군은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각자의 사령관을 두고 서로 다른 단체의 이름을 쓰며 개별적인 활동을 하던 상태라는 것입니다.
- 러시아의 입장 : 당시 소련은 항일 독립군의 소련 이주 상황이 매우 부담스러웠습니다. 드넓은 영토의 군사경계선을 모두 경계하기 힘들었던 상황에서 아무리 소련의 적국이었던 일본에 대항하는 단체라고는 하지만 자국 내 또 하나의 군벌이 집결되고 있는 것이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합하기 위해 기존 연해주에 주둔 중이었던 독립군 세력(대한의용군, 고려의용군)에게 이들을 통합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당시 이 두 세력마저도 서로 통합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연해주로 밀려 들어오는 독립군들의 체계를 하나로 획일화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 러시아 군대와 독립군의 갈등 : 현지 소련 군대는 이제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입장을 바꿔 현재 대한민국 제주도에 대만 독립군이 무장한 채로 국경을 넘어 들어온다고 상상 해보면 독립군이 자기들 마음대로 국경을 넘는 것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상황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내려진 무장 해제 명령 :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소련은 국경을 넘으려는 독립군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국경을 넘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자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소련에게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많은 독립군들이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당시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서일, 이범석 장군의 군대는 소련 입성을 포기하였으며, 무장을 해제하고 소련으로 들어간 독립군들은 ‘자유시’로 이동 조치되어 재러 의용군이었던 일명 ‘사할린 부대(대한 의용군)’에 편입됩니다. (회수한 무기는 이때 다시 독립군들에게 돌려준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 자유시 현지인과의 갈등 : 자유시로 이동 조치된 독립군들은 이제 사할린 부대(대한 의용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보급은 턱없이 부족하여 식량 부족을 겪었으며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려 했으나, 당연히 이방인이었을 이들에게 순순히 식량을 내어주는 현지인은 없었습니다. 갈수록 물자 부족해지고 결국 사할린 부대는 현지인들을 약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자유시 참변 = 사할린 부대에 대한 강제 무장 해제 : 결국 소련은 자유시에 주둔한 사할린 부대에 대한 강제 무장 해제 조치 명령을 내리고 또 다른 한인 무장조직이엇던 ‘고려 의용군’을 앞세워 같은 독립군이었던 ‘사할린 부대'(대한 의용군) 진압을 시도합니다. 마침내 자유시에서 벌어진 같은 동족 간의 무력 진압은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시켰고 결과적으로 사할린 부대(대한 의용군)는 해체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 사태입니다.
자유시 참변에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몰살시켰다?
먼저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이 벌어진 현장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소련의 무장 해제 명령을 받아들이고 이를 같은 독립군들에게 무기를 반납하게끔 선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이것은 자유시 참변과 같은 비극을 빚어내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했든 자기네 나라 영토에서 무기를 든 낯선 이방인의 군대를 반가워하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 장군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은, 참변 이후 홍범도 장군이 레닌에게 권총을 하사받았으며, 소련의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만, 당시 홍범도 장군의 상황은 돌아갈 가족도 모두 숨진 상태였으며, 독립군마저 해체되어 오도 가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소련은 홍범도 장군이 조선인들에게 추앙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지역 지도자로 내세워 더이상의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으며, 홍범도 장군 역시 갈 곳 없는 처지에서 소련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에 입당에 연금을 수령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였던 것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공산주의자다?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주장입니다. 먼저, 당시 공산주의 최초의 국가인 소련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공동의 적이었던 독일을 상대로 미국과 연합국 지위에 있었으며 실제로 레닌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인 공산주의는 독재자들의 수단이 되기 전까지는 완벽에 가까운 이상적인 구조였습니다. 그로 인해 사상적으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진영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시대적 환경을 고려할 때 일제의 치하에 있던 대한민국이 이상적인 자주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하나의 사상적 지지를 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만약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이념적인 논란이 타당하려면 홍범도 장군이 남북 분단 시점 김일성의 편을 들었는가로 판단해야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남북이 분단되기 전 조국 해방을 2년 앞두고 카자흐스탄(당시 소련)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홍범도 장군을 폄하하려면 당시 소련과 동맹을 맺은 미국을 적국으로 대하고 보수 진영에서 찬양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훼손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긴 홍범도 장군의 유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이념과 사상으로 얼룩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독립운동사는 단순히 빛나는 영웅들의 투쟁과 영웅담으로 미화되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아픔과 희생이 너무나 큰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희생정신과 고결함에 박수를 치지만 이들도 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인물들이었음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투사분들의 용기와 헌신을 정치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이분들이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숭고한 국가의 헌신과 민족정신을 깨닫고 역사적 유산으로써 후대에 계승되어 질 수 있도록 올바른 역사관을 현대의 정치가들이 앞장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